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베스트 (문단 편집)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1950~60년대에 걸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첫번째 황금기를 준비하고 있던 '''[[맷 버스비]] 경'''의 눈에 띄어 1961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 팀에 입단. 1963년 17세의 나이로 1군에 승격하고 곧바로 주전자리를 꿰찼다는 점에서 그 재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감히 짐작할수가 있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58년 [[뮌헨 비행기 참사]]로 팀 전력이 가루가 되어버린 상황이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버스비 감독과 [[바비 찰튼]], 데니스 바이올렛, 빌 폴크스를 중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팀 리빌딩을 해 나가던 상황이었다. 앞서 1961년 '''[[데니스 로]]'''[* [[에릭 칸토나]] 이전 맨유에서 "KING"이라 불렸던, 맨유에서만 309경기 171골을 터트린 특급 공격수였다.]를 공수해온 버스비는 마침내 베스트를 1군에 끌어올렸고, 드디어 맨유 역사상 뿐만 아니라 세계 축구 역사상 최강의 트리오 중 하나인[* 과거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와 [[AC 밀란]]의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 오렌지 삼총사 정도가 베스트-찰튼-로 트리오에 견줄만 하다. 21세기 들어서는 [[히바우두]]-[[호나우두]]-[[호나우지뉴]]의 3R, [[FC 바르셀로나]]의 황금기를 이끈 [[리오넬 메시]]-[[다비드 비야]]-[[페드로 로드리게스]]의 MVP나 [[리오넬 메시]]-[[루이스 수아레스]]-[[네이마르 주니오르]]의 [[MSN(축구용어)|MSN]], [[사비 에르난데스]]-[[세르히오 부스케츠]]-[[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세얼간이, [[레알 마드리드 CF]]의 [[가레스 베일]]-[[카림 벤제마]]-[[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BBC(축구용어)|BBC]]가 등장하여 묻히는 감이 있다.] '''로-베스트-찰튼'''라인이 완성되었다. [* 이 라인은 3인 전원 '''[[발롱도르]] 수상자'''라는 점에서 그 포스의 편린을 보여준다. 1964년 로, 1966년 찰튼 경, 1968년 베스트. 다른 트리오에서는 [[히바우두]]-[[호나우두]]-[[호나우지뉴]]의 3R이 전원 발롱도르 수상자이다. ] 로-베스트-찰튼 라인은 뮌헨 참사 후 재기불능 판정을 받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965년, 8년 만에 잉글랜드 1부리그(現 [[프리미어 리그]]) 정상에 올려놓는 데 성공한다. 2년 후인 66-67 시즌에 다시 한번 트로피를 들어올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10년 전 비극적인 사고로 인해 이루지 못했던 유럽 정벌에의 꿈을 다시금 외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chef.bbci.co.uk/_86868773_best.jpg|width=100%]]}}} || '''그리고 1967-68 시즌, 마침내 클럽 역사상 최초이자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빅 이어를 들어올리는데 성공한다.''' 당시 결승전 상대는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버티고 있던 [[포르투갈]]의 벤피카였는데,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맨유는 찰튼 경의 선제골과 베스트의 쐐기골, 그리고 다시 한번 찰튼의 마무리로 벤피카를 4-1로 떡실신시켜버린다. 이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저 트리오의 압도적인 경기력에 매혹된 사람들은 그 때부터 맨유를 붉은 악마(Red Devils)라 부르기 시작했고, 베스트는 해당 시즌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909251257340107000001070100-001.jpg|width=100%]]}}} || 상술한 대로 조지 베스트는 1968년 [[UEFA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언컵]] 우승 및 [[발롱도르]]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이어 68-69 시즌에도 변함없는 활약으로 맨유 팬들을 열광케 만들었다. 하지만 1969년 버스비가 감독직을 은퇴한 직후 팀 성적이 곤두박질 치고 강등 될 위기에 처하자 팀의 주축 선수들이 대거 이탈하게 되고 남아있는 선수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 조지 베스트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된다는 부담감이 컸다, 그후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되며 과도한 음주, 폭행 등 기행만을 일삼으며 그라운드에서도 모습을 잘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베스트가 마지막으로 올드 트래포드에 모습을 보인날엔 감독이 그를 선발로 내보내려 했는데 갑자기 락커룸의 문을 누가 두들기고 열어보니 여자와 함께 있는 베스트의 모습이 나타났다. 베스트는 전날부터 엄청나게 술을 마신것인지 술에 쩔어 몸이 무거웠기 때문에 그를 선발에서 제외 시키겠다고 했다. 그러고 베스트는 그럼 경기를 뛰지 않겠다며 떠나고 다신 올드 트래포드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팀 프런트는 1974년, 그런 베스트를 방출하기에 이른다.[* 원래 버스비가 있던 시절부터 기행으로 유명했다. 15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던 당시만 해도 올드 트래포트 안 응접실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곤 하는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였으나 17세에 1군에 데뷔하고 슈퍼스타에 오르자 거만해지며 성격이 바뀌었다. 경기가 끝나면 훈련에 불참하고 집에 갔으며 보드진에게 원정경기가 끝날 때 마다 왕복항공권을 요구했고, 그라운드에서 거칠게 태클이 들어오자 보복으로 침을 뱉고 싸움을 벌이는 등 기행으로 유명했다. 특히나 1969년에는 새해 다짐으로 술과 여자를 포기했으나 새해가 시작된지 20분만에 지옥같다며 포기 할 정도로 원래 프로의식과는 담을 쌓은 선수였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기 보다는 버스비가 조지 베스트의 통제를 정말 잘 했던 것 이다.] 중앙 공격수가 아닌 윙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맨유 시절 쌓은 스탯은 '''361경기 138골'''. 팀 주전 공격수였던 데니스 로의 307경기 171골과 비교해도 그렇게 큰 차이가 없는 수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